무정 정 정민
2018. 1. 12. 07:12
2018. 1. 12. 07:12
바람의 언덕

바람소리/茂正 鄭政敏
들꽃 흔들리는 길에
황야를 달려온 소리
아무리 조심하여 지나가도
그 거친 호흡이
발끝에서 들린다
꽃향기 산산이 부서지는
오월의 아카시아 숲 속에도
피부를 만지고 지나는
작은 스침은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시간의 소리
파도가 출렁이는 서해아침
모든 것이 잠에서 깨어나듯
잊어버린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억이
바람소리처럼 귓가에 들린다
심연의 고요 속에서도
기어이 듣고 마는 소리
사랑과 눈물과 시간의 바람소리
내 삶의 소리.

바람의 언덕/무정 정정민
바람의 언덕이란 말만으로도 추위가 느껴진다
성난 바람이 나무며 집이며 풀을 할퀴고 지나갈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춥고 무서울 것 같다
바람이 우는 소리가 잠인들 제대로 자게 하겠는가
겨울 문풍지 우는 소리에도 무서웠던 일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전깃줄도 바람에 시달려 우는 소릴 듣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댓잎 우는 소릴 많이 듣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바람의 언덕이란 곳은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다
어느 해던가 거제도에 갔었다
그곳에 바람의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 아래 하룻밤을 유하며
바람의 언덕에 올랐는데 참 추웠다
바다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전신을 오그라 들게 했고
달빛도 차가운 풍차의 조명도
날 선 마귀할멈의 모습처럼 보여 떨었던 기억도 있다
이후 파주에서 여름과 겨울에 바람의 언덕을
올라 보았고 최근엔 푸른 잎 싱그러운
순천만의 바람의 언덕도 올라 보아
겨울바람의 언덕이 아닌 여름 바람의 언덕
시원하고 싱그러워 무척 좋았던 기억도 생겼다
여러 곳 공원의 일부에 바람의 언덕이 있어
잠시 걸어 보며 좋은 추억 나쁜 추억을
떠올리며 카메라에 담아 보고 있다
당연히 "폭풍의 언덕"이란 소설도 생각난다
서른 살의 나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기 일 년 전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 작품으로,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무대로 벌어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를 그리고 있다.
발표 당시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던 이 작품은
백 년이 지난 오늘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멜빌의 '백경'과 비교되리 만치 그 비극성과 시성(詩性)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본능적이며 야만적이기까지 한
히스클리프와 오만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그에게 끌리는
캐서린이라는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적 인간을 통해,
작가는 인간 실존의 세계를 강렬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로도 영화로도 봤던 "폭풍의 언덕"과
바람의 언덕을 같이 떠올리니 바람의 언덕이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글 사진/무정 정정민
창밖이 어둑해진 초저녁이다.
내가 있는 곳의 불빛에 밖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 빛무리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보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무료함인 것 같다.
책을 보다가 그것도 심드렁해지고 음악을 들어봐도
그것도 마음에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때도 있다.
무엇엔가 골똘하고 싶은 경우인데
그것도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혼자 있는 시간에 골똘할 무엇이 있다면 좋은데
그러고 싶지 않고 자꾸 무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지도 모른다.
혼자 있다 하더라도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훌쩍 갈 수 있는 몸이라면 좋겠는데 근무 중이니
보이지 않는 시간에 감금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일이 늘 있는 일임에도 오늘 유난한 것은
이해가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홀로 남은 사람이란 이상한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아내가 누군가와 약속이 있어서 꽃단장을 하고 나갔다.
아들도 무슨 심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준비운동을 하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갔다.
직장에 다니는 둘째가 종무식을 했다면서
유난히 일찍 들어오더니 언니와 외식약속을 했다며
또 밝은 표정으로 나가 버린다.
나는 남아 있고 가족들이 하나하나 나가니
아무렇지도 않던 기분이 묘하게 외로워졌다.
가족들이 있을 때는 아무래도 나는 군림하는 입장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하면서
아빠에게 잘하라는 당부를 하므로
아이들이 공손하고 "무엇을 드시겠느냐?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하는데 강아지만 남아
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니
혼자서 왕 노릇도 틀린 것이고
당연히 쓸쓸해지지 않겠는가?
지금이야, 자신의 볼일을 보러 나간 가족이
자정을 넘기지 않고 다 돌아올 것이니
긴 시간을 홀로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이 결혼하게 된다면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어질지 생각하니 이런 연습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지금 초 저녁의 내 기분은
뜰에 가득한 향기 나는 과일이
모두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이 있던 자리에
헐렁한 바람만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소리가 가슴에서 들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