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풍경 소리/무정 정정민 고요한 내 마음에 그리움이 일렁일 때마다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 산굽이 돌아 흘러내리는 청강한 물소리 인가하면 잠 못 이루는 아기 새의 잠투정 같기도 하여 두 귀를 바짝 새우면 끊긴 듯 잠긴 듯 먼 듯 가까운 듯 밤새워 들리는 소리 잠 못 드는 그리움이었어.

  

자존심 시/해조 이숙인 사진/무정 정정민 절간 마당 누각이란 감옥에 묶여 자유의지란 애초에 썩어 문드러졌소 그런데 어찌하오 평생을 두드려 맞고 살았어도 꼿꼿했던 어떤 놈 넋이 씌웠는지 대가리 처박는 바람이 세차면 세찰수록 비틀리는 사지 바로 일으켜 악문 이 사이로 밀어내는 소리는 맑고 고운 소리로 산야의 초목에 들려주고 싶었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오 당신네가 보기엔 순종이라 웃겠지만 하찮게 보는 속내는 피 튀기며 울부짖는 악다구니요 절대 동화되지 않겠노라 사지 잘린놈의 투쟁이요

  

내마음의 풍경 소리 시/세이하니 한휘준 사진/무정 정정민 내마음에 그대를 위해 에머랄드빛 투명한 풍경하나 걸어두고싶다 그대 투명한 물빛 그리움으로 파도가 부서지듯 다가서도 빛나는 울음 울어 줄 수 있도록 내 마음에 그대를 위해 흑진주같이 까아만 풍경하나 걸어두고 싶다 깊은밤 꿈결에 살그머니 다가서 그대 아련한 체취 머리맡에 남겨 둘때 부서지는 달빛에도 향기로운 사랑의 울음 울 수 있도록 내마음에 그대를 위해 향기로운 울음 번져나는 풍경하나 걸어두고싶다

 

용주사/옮긴 글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용주사/무정 정정민 융·건릉에서 가까운 사찰 사진을 볼 때마다 용주사와 왕릉은 같이 올라올 때가 많았다. 왕릉에 벌써 세 번째 갔지만 용주사가 어디에 있는지 규모나 모양을 알지 못해 궁금했었다. 이번 기회에 구경한 번 나섰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효행관도 있어 둘러보고 주변을 구석구석 잘 둘러보았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며 절을 세우고 다하지 못한 효를 안타까워한 정조를 생각하며 늘 아파 계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게 유난히 잘해 주신 아버지는 자식인 내가 다리를 다쳐 고생할 때 가슴으로 우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 번은 화를 내시며 내가 딛고 다니던 지팡을 발로 밟아 동강을 내시며 앞으로는 절대로 지팡이를 딛지 말라고 하셨다 인자하신 아버지의 성난 얼굴 지금도 그대로 생각난다. 이제는 돌아가셨던 당시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고 또 그때의 내 나이보다 더 큰 자식을 둔 지금 내 아버지를 생각하고 내 자식을 생각했었다. 정조 왕의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뒤주 속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린 이산은 얼마나 눈물로 보았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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