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남지 1
  

물그림자 2 詩 寫眞/茂正 鄭政敏 천 년의 침묵처럼 미동 하나 없는 호수 소나무도 갈대도 그 속에 살고 있다. 내 마음도 그 속에 있으려나 날아가는 철새도 바람에 흩날리던 낙엽까지 투명 하게 그려내는 명경지수에 무엇을 숨길 수 있을까 물그림자 어리는 호수에 우리 마음 비추어 보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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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옮긴 글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으로 짜 올린 어정, 기와편,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1964년 사적 제 135호로 지정되었다.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9차에 걸쳐 수행되었다. 조사 결과 사비시대에 조성된 인공수로, 목조저수조, 우물지와 도로유구, 수정 경작지, 토기 가마터, 굴립주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6~7세기와 3~4세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주로 6세기 무렵 조성하여 사용된 인공수로와, 목조저수조 내부의 퇴적된 개흙층에서 출토되었는데, 행정 구역명, 인명, 지명 및 수전을 개간했던 사실이 적혀있다. 관련 기록 1. 궁남지에 대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년)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백제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발굴된바 있다. 2. 《삼국사기》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의 처첩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 붙은 이름이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다. 3. 《삼국사기》 의자왕 15년조에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4.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설화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서동(薯童)으로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다.

  

궁남지/무정 정정민 궁남지가 연꽃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아는 시인으로부터 들은 지 오래되었다 부여에 있다는 것도 기억하는 중에 지난 4월 고향으로 갈 일이 있어 부여를 거치며 가게 되었다 백제의 고도 부여를 구경하여 보는 것도 꼭 해야 할 필 수 코스로 생각했다 내가 백제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4월에는 백마강과 낙화암 고란사까지 구경하고 서동 공원 안에 있는 궁남지는 미루었다 아직 연꽃이 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고향에 가게 된 7월 여름 휴가차 가는 길은 여유로워 궁남지에 들리게 되었다 생각한 것보다 규모가 컸다 다양한 볼거리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연의 종류도 단순하게 하나 정도인 전남 무안의 백련 지나 덕진 연못의 홍련 지에 비하여 화려하게 보였다 수련도 홍련 황련 가시욘 그리고 물 양귀비 일반연도 백련 홍련 등이 있었다. 연꽃축제나 부대행사로 하여 그곳을 찾는 사람이 무척 많을 것 같았다 궁남지를 중심으로 한 연밭을 차로 혹은 걸어서 한 바퀴 돌았다. 정말 마음속으로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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