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꽃 봉오리를 보니
옮긴글 寫眞/茂正 鄭政敏
이오덕 선생님
편지 받았습니다.
왠지 눈시울이 화끈 더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선생님 글월에서 느꼈습니다.
출생지가 남의 나라였던 저는
여지껏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아홉 살 때 찾아온 고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는지요?
나에게 한국이라는 조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무면 치마폭에서만
느씰 수 있었을 뿐입니다.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국은 나에게 전쟁과 굶주림,
병마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위에 몸소리처지는 외로움을.
자기나라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무던히 나의 이 한국 땅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메말라진 흙 속에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어,
여지껏 목말라 허덕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선생님만은 제 마음 이해해 주실 겝니다.
나라고, 바보 아닌 이상
돈을 벌 줄 모르겠습니까?
돈이면 다아되는 세상이 싫어,
나는 돈조차 싫었습니다.
돈 때문에 죄를 짓고,
하늘까지 부끄러워 못 보게 되면
어쩌겠어요?
내게 남은 건,
맑게 맑게 트인 푸른 빛 하늘 한 조각.
이오덕 선생님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라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김선영 선샌께서 그곳에 찾아가셨겠지요?
조선일보사에서 찾아다 주신 상금을 받아 쥐고,
김선생 딱한 사정을 들었습니다.
차비조차 변변히 받으려 하지 않고,
추운 산모롱이 길을 가다가 손을 흔들던 모습이
지금은 자꾸자꾸 보여집니다.
그래서 또 울고 싶어지고.
아무래도 나는 울기쟁인가 봅니다.
'토끼나라' 원고를 보냅니다.
내 원고는 거의 쉰에서 백 장이 되어
취급하기가 곤란하지 않을까요?
지금 가지고 있는 작품,
미발표만으로 이십여 편(일천 장)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선생님 의견만 따르겠습니다.
아동문학가협회 가입서를 동봉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열한 시가 가까워 옵니다.
손이 시러 더 쓸 수도 없군요.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안녕히!
1973년 2월 8일
권정생드림
-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에서
이 책은 두 사람이 20년 넘게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집이다.
소박하고 간결한 편지글 사이에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존경과 격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생각들이 배어나오고,
글에 대한 고민과
문학계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 한겨레신문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무정 정정민
어떤 꽃이 피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는 때가 있다.
나에게도 꽃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앵두꽃이 피면 여승으로 살다 불혹에 입적하신
회색 승의의 누님이 생각난다.
목련꽃이 피면 피부가 하얀 고운 여자친구가
생각난다. 그녀의 생일이 4월이라
목련꽃과 같은 그녀를 생각하며
창작한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목련꽃 피는 어느 날 하늘나라로 간
또 다른 친구가 생각나기도 한다.
살구 꽃 봉오리를 볼 때면
내 누님의 친구동생이 생각난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위였는데
언니의 심부름으로 누나를 만나러 왔다가
누나가 출타 중이어서
나와 같이 한 시간 정도 같이 있었는데
사춘기의 시골집에서 단둘이 있자니
야릇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겨울이라 안방에 앉아
서로 다른 삶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당시 그녀는 목포여고를 졸업했었는데
키가 크고 얼굴에 여드름이 한둘 있었다.
싱그러운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든지
마음속에서 자꾸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소를 묻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젊은이들의 일상이야기였지만
작은 산골 작은 마을에서 살던 나에게는
도시처녀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시골소년이
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기 6개월
갑자기 편지의 답장이 오지 않았다.
두어 번 더 편지를 보내다 결국 포기했는데
나중에 누나로부터 듣게 된 소식은
그녀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서운한 생각에 뜰을 거니는데
살구꽃 봉오리가 터지려 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살구꽃 봉오리는 눈물이었다.
사랑한 사이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살구 이야기/무정 정정민
살구 맛이 좋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장마로 물기가 잔뜩 들어간 살구는
보기엔 탐스러워도 한 입 베어 물면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임실에 사는 친구가
자신의 동네는 옥정호라는 호수가 가깝고
산새가 아름다워 과실도 맛있다고 하였다
믿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곳의 살구는 맛이 정말 좋았다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새콤달콤한 맛
몇 해 전이다
존경하는 원로 작가님께서
집으로 초대하여 갔는데
살구가 막 익기 시작하는 때였다
알이 굵지는 않았지만 맛있게 보였다
한 바구니 가득 따 주시며
맛보라 하시었다
햇살이 눈 부신 초여름의 살구는
그 어느 때보다 향기로웠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저축해 가는 것이다
그것을 풀어 보며 미소 짓는 것이
요즘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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