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2
  

창가에 서면 시·영상/무정 정정민 삭풍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정월의 창가에 서면 마음은 벌써 소년이 되고 고향집 앞산으로 간다. 마른 풀 따뜻한 양지에서 붉다 못해 검게 변한 허깨비 같은 청미래 열매를 따며 마을 입구를 본다. 새콤한 맛 물기 없는 열매의 아쉬움처럼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외로움에 문득 한기를 느끼고 집으로 가면 따뜻한 아랫목 하얀 머리에 비녀를 꽂고 계신 할머니가 반가이 맞아 주던 이제는 갈 수 없는 그 시절 그때가 자꾸 되살아난다. 할머니가 그립다.

  

밀 창을 보노라면 시 사진/정정민 햇살이 창문을 넘어서는 오후 따끈한 구들에 앉아 윗방과 아랫방을 차단한 밀 창을 보노라면 김이 나는 고구마를 동치미와 같이 가져 올 흰 앞치마 두른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 스물여덟 어느 날 몸이 파처럼 누워 있던 날 밀 창이 드르륵 열리고 머리 깎고 스님 되신 누님께서 따끈한 죽 한 그릇 가져 오시던 익산의 그 절이 생각난다. 학창시절 전주 예수병원이 보이던 기숙사 아무도 없는 외로움에 눈물짓던 나에게 노란 냄비에 라면 한 그릇 배달하던 여자 친구가 생각난다. 이제 흰 머리 얼굴에는 주름도 생기고 눈빛마저 흐려졌지만 기억 속 이야기는 더 선명하고 더 화려한지 모르겠다.

  

창 너머에 시·영상/무정 정정민 외지고 낯선 집 창문으로 세상을 보면 그 밖이 자꾸 궁금하다. 한겨울 창가에 붙어 푸른 눈으로 안을 보는 사철나무도 그렇고 한가하게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어디서 오는 것이며 누가 타고 있을까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마장 떨어져 있는 산기슭에 무슨 나무가 자라나 어떤 짐승이 살고 있나 봄 여름 가을 모습은 어떨지 언젠가 다시 와서 보리란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까 나뭇잎 바람에 쓸리는 소리에도 무슨 나뭇잎일까 어디까지 갈까 궁금하다.

  

달 뜨는 언덕/茂正鄭政敏 바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카리브 해의 낭만에 젖고 싶다면 곧 달려서 가고 시베리아의 눈꽃 축제에 빠져서 닥터 지바고의 사랑을 한껏 향유하고 싶다면 거칠 것이 없이 달려서 갈 수 있는 그런 바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해 뜨는 어느 동해 바다에서 싱그런 갯내음을 맡고 싶고 달 뜨는 작은 산골에서 낭만적인 시인의 노래를 듣고 싶다면 주저함이 없이 갈 수 있는 바람이라면 업무에 시달리고 삶의 고달픔에 지쳐있는 고독한 사람 누구에게나 선망되는 일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소망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작은 언덕 라이브 카페 "해 뜨는 집"에 갈 일이 생겼던 것이다. 연시의 대가라 할 중년의 시인과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카렛을 닮은 여인을 만났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창 밖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과 음식점의 불빛을 보면서 추가 열의"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를 주문해서 들으니 내가 시인이란 생각보다는 초청받은 페르시아 왕자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늑한 카페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흐느끼듯 불러대는 초청가수의 노래가 나를 젖게 한 것인가 아니면 향 짙은 커피 때문인가. 도무지 흥겨운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삶의 여정에서 무수한 사람을 만나지만 만나서 행복지는 사람이 있다. 만난 사람이 나를 왕자처럼 여겨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잘난 구석이 한 군데가 없음에도 작은 것이라도 칭찬을 해주고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면 그 말이 인사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싫지 않다. 이처럼 말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내가 왕자란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년의 시인은 시처럼 말을 하고, 눈빛이 고운 아름다운 여인은 소설 속 스카렛처럼 노래를 흥얼이면서 희미한 불빛 속에서 마주 앉으니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분위기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척 들뜨는 행복이 분명했다. 창 밖에는 마땅히 떠야 할 달이 뜨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이 카페에 왔고 지는 해와 뜨는 달을 분명히 보았고 그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다시 왔건만 달은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달보다 더욱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두 분의 신사와 숙녀를 만나 가슴에 뜨는 달을 보았다. 행복하고 싶다면 달이 뜨는 카페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향 짙은 차와 분위기 있는 노래를 들어 볼 일이다. 가끔은 눈빛을 마주치면서 수줍어해도 된다. 그러면 가슴 밑에서 살금살금 올라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창밖의 불빛도 유난히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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