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피는 날의 슬픔/무정 정정민 대학병원 중환자실 손에 빨간 액체를 바르고 청의를 입고서야 들어갔다 날 반겨 맞아야 할 사람이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숨을 쉬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내 청력을 의심했다 움직임도 멈춘 지 오랜 것 같았다 표정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해야 하는가 난 그를 알고 있어서 갔지만 그는 누가 오는지 가는지 관심 밖의 일처럼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올해로 56세의 미남자였다. 두 딸과 아내가 있는 참으로 잘 생긴 꽃미남 춤을 잘 추고 친구를 좋아하는 건실한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의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만들었는지 자신의 가게문을 닫고 이틀의 폭음 뒤에 집으로 들어와 문지방을 넘다가 넘어졌다는데 수도 없이 드나들던 문턱이 그날은 유난히 높았단 말인가 그것이 자신의 집 문턱을 겨우 넘어보는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는 다만 누워 있을 뿐이다 살아 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인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애지중지 키운 두 딸이 아빠라는 말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이것을 살아 있다고 해야 하는가 산소호흡기만 의지하여 겨우 지낸다는 말 그의 아내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쏟아 냈다 우리는 어릴 적 부터 친구였는데 이제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도 모른 체 하는 사람이 나를 아는 체 하겠는가만 왜 그리도 섭섭할까 만나면 손을 잡고 흔들던 모습이 곱게 웃던 모습이 영영 떠나지 않는데 이제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나를, 얼마나 서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다시 손을 잡고 흔들며 웃고 싶다는 것을 알까 어깨동무하면서 어릴 적 같이 하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을 최신 유행 곡을 서로 부르고 싶다는 것을 알까 못하는 술이나마 마주치고 싶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같이 하던 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면 그 행복한 순간을 누가 같이 해줄까 어서 일어나거라 환한 목련꽃 같은 미소를 나에게 흘려다오 가만히 만지던 내 손을 어서 만져다오 나에게 잘 지냈느냐고 안부도 물어야 하지 않니? 중환자실은 너무 비싼 곳이야 이제 집으로 가야 하지 않겠니? 개나리 꽃이 피기 시작한 너의 집으로 가서 우리 진한 커피 한 잔을 같이하자, 친구야! ps: 8년전 이른 봄 한양 대학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가고 만 친구 결국 커피 한 잔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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