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가에 앉으니 생각난다
 

난로 가에 앉으니 생각난다/정정민 창 밖의 기온이 몹시 낮으면 환하게 불을 밝힌 사무실이 유난히 따뜻해 보인다. 난로 불을 켜놓고 앉아 있으면 마음도 따라서 훈훈해 진다. 이런 날은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평범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난히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기억해 보면 난로 가에 같이 앉아 본 적이 없다. 조용한 카페에서 차를 같이 나눈 기억도 없다. 다정하게 여행을 다닌 기억도 없다. 그렇지만, 가장 외로운 시간에 가장 많이 그리웠던 친구. 그는 지금 무엇을 할지 너무 궁금하다. 10대 후반에 맨 처음 받아본 편지가 고작인데 그 편지에는 구구절절이 그립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같은 문자로 그토록 영롱한 이슬 같은 글을 가슴이 저려서 지탱하기 힘들도록 쓸 수가 있었는지. 읽고 또 읽어도 질리기는커녕 또 다시 읽게 하였다. 수십 번을 읽고 다 외워버린 글을 그래도 또 읽고 편지가 흐물거릴 정도로 읽었지만 그 편지는 너무 소중하여 가슴에 넣고 다녔다. 혼자만 읽기가 아까워 친구에게도 보여줬는데 얼굴도 모르는 내 친구의 글을 곁에서 읽던 친구도 황홀하여 거진 다 외워 버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해 버렸다. 그 엄청난 그리움을 안고 어떻게 시집을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만났던 날 천천히 돌아서서 가면서 다시 돌아보고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으로 사라져 갔다. 그날은 눈도 많이 왔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내리는 눈은 서로 깨끗하게 갈라 놓았다. 그래서 그 편지는 갈가리 찢겨 졌다. 가슴에 패이도록 새긴 편짓글도 그렇게 찢겼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다정한 이름이 기억하기 싫은 이름이요. 듣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이름이 되어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어올 때마다 아픔 같은 상처들이 가시가 되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30년 지나갔다. 아름답고 황홀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긴 아름다움보다 짧은 이별의 순간을 더 많이 생각하는지. 스스로 의문을 재기했더니 다시 아름다워졌고 감사가 되었다. 다만,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이가 무슨 원수지간처럼 되어서야 말도 안된다는 생각.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고 결혼에 대한 선택이 꼭 나만 되어야 한다는 법칙도 없는데 나도 결혼했으면서 먼저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난할 자격이 있기나 한 것처럼 굴었다. 잔주름 생기고 흰 머리칼이 생긴 뒤에 만나자는 말을 해왔었다. 그런데 나는 늘 거절해 왔다. 아무래도 미워했었나 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단둘이 만나게 되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늘 미안했다는 말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오늘은 그 친구가 생각난다. 눈가에 어리던 이슬 같은 것이 생각난다. 나도 자꾸 미안해 지는 마음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난로 가에서 한 잔의 차를 나눌 수는 없을까 해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