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사랑하는 까닭/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복 종/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행 복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발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존재/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고적한 밤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한용운/옮긴 글
요약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했으며
불교 혁신 운동을 벌였고, 시, 시조, 소설을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목차펼치기
1.개요
2.생애
3.불교사상과 불교혁신운동
4.독립사상과 민족운동
5.문학세계
개요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
·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본관은 청주(淸州).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
생애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불교사상과 불교혁신운동
흔히 불교사회주의로 요약되는 그의 불교사상은 불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족 현실 전반에 대한 혁명적 사상의 기반을 이루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불교혁신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책이며,
당시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불교사상이 진보주의·평등주의·구세주의의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조선불교유신론〉)그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염불당 등의 기존의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민중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그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을 펴내고 〈유심〉·〈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는 등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불교의 민중화와 그의 불교활동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불교의 자주화운동이다.
1910년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그 이듬해에 박한영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후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했는데,
그중 정교분립을 주장한 것은 종교를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서 곧 정토를 구하는 대승적인 입장을 취했다.
1933년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를 저술했으며,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도
이러한 불교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립사상과 민족운동
그의 비타협적인 반일 독립운동 역시 불교혁신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는 1919년 3·1운동의 참여를 들 수 있다.
그는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참여한 다음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 검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이유서〉는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그는 이 글을 통해 제국주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이해와 민족의 독립 근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제시했다.
그는 다른 모든 사상에 앞서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우선함을,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민족자존이 요구됨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민족의식이 편협한 국가주의가 아니라 민족간이나 국가간의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자주독립의 조건이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에 있음을 천명하여 물질문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조선 식민지 지배의 근거로 삼았던 일제의 허구적 논리를 정확히 비판했다.
이는 준비론이나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등
결국 일본의 식민정책에 부합한 개량론과는 질을 달리하는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으로 평가된다. 좌·우파 간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한 것도 그의 대표적인 민족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전부터 우파의 민족운동과 좌파의 사회운동이 분열되어서는
안 됨을 역설한 바 있으므로 신간회에 관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에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했을 때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음을 주장하고
신간회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또한 그는 여성해방운동과 농민·노동 운동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자주화운동에 앞장선 것도 민족독립운동의 하나로 보인다.
문학세계
그가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불교개혁사상이나 민족독립사상,
그리고 그 실천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문학활동은 시에서 출발하여 시조와 한시 및 〈죽음〉·〈흑풍〉·〈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로까지 확산되었으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낳은 것은
역시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시 장르이다.
1925년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이듬해 안동서관에서 발행한
〈님의 침묵〉은 당시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더 절실하게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이 부재한 상황을 통해 '나'가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를 드러내고, 새로이 '나'가 님과 합일될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는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도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진리와 통한다. 이러한 시적 인식을 통해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실천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탁월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부분 1930년대에 창작된 그의 소설은
신소설적인 계몽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그가 근대소설의 특수성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가운데
소설을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생각한 데서 연유한다.
즉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직접적으로
항일독립사상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소설을 창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를 무대로 한 〈흑풍〉에서도
일제에 대한 투쟁정신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의 고취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전집〉 전6권이 간행되었다.
만해마을에서/무정 정정민
만해 마을에 도착하자 맨 먼저 생각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유배지였다는 것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의 민족과 나라 사랑
그리고 시 세계였다.
수심교를 지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해가 산마루에 걸려 이내 어둠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이 만해마을을 삼켜버리면
주변 풍경을 볼 수도 없고 시인의 시와 관련된
어떤 것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기념관부터 찾아가 가볍게 둘러 보았지만
역시 시간이 많지 않아 결국 가볍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같이 온 친구들을 자꾸 찾아야 했고
곧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은 대기해야 내려가는 차를 탈 수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두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린단 말인가
주차장에서 개울까지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서서도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우선 맑은 물과 개울에 수없이 쌓아있는 돌탑
그리고 차 타기를 기다려 보았다
몇십 분인가를 기다려 보니 슬슬 허리도 아프고
발목도 아파졌다. 다리 하나로 오래 서보면
다리의 피로도가 급격하게 몰려온다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좌우로 교대하며
한쪽 다리를 쉴 수 있어 꽤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지만, 다리 하나만을 사용하면
교대로 쉴 수 없어 몇십 분이면 이미 지쳐버린다
결국 쥐가 나는 것을 느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길게 늘어선 맨 앞자리로 가서
양해를 구하고 차를 먼저 타던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그곳에 앉아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방법이다.
차선책을 택해야 했다. 나를 먼저 차에 태워주지 않아서였다
다행이라면 관리인이 자신의 자리에 나를 앉게 했다
그렇게 기다린 두 시간이 지나 친구가 나타나
우린 험하고 좁은 어두운 산길을 내려올 수 있었다
나에게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준 사람들에게 고맙긴 해도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약점은
나를 슬프게 하기도 했고 감사하는 일에 더욱 익숙하게
하기도 했다.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 문학관이 아쉬워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를 같이 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