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배달 사고
글. 사진/茂正 鄭政敏
우장산역 지하도에 케이크가 널브러져 있었다.
울고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두 아이와
30대 후반의 건강한 아주머니가
그 케이크를 바라보고 각자의 처지가 딱하여
울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한푼이라도 벌어 볼 요량으로 케이크배달을 나선
한 아주머니가 오만 원 상당의 케이크를 들고
조심스럽게 배달처를 향하여 가고 있었다.
이때 초등학생형제인 두 아이가 장난을 치며
지하철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다가
부주의하여 그만 그 케이크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케이크는 내동댕이쳐지고 아이도 넘어졌다.
이 케이크를 배달하러 나선 아주머니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 배달하여 자신의 손에 쥐어질
만원은 고사하고
오만의 케이크를 변상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서로 참으로 딱한 입장이었다.
아이는 오만이 너무 크고
겁이 나서 울고 있고 이 아이에게 오만 원을
변상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대하여
아주머니는 안타까워 울고 있는 것이었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 케이크 배달 일을 할 리 없고
큰 수입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모처럼 하게 된 일이 사고로 이어지니
자신의 처지가 한탄이 되고 아이를 다그쳐
배상을 요구하자니 그도 딱하여 같이 울고 있었다.
그 길을 지나던 50대 아저씨 한 분이
이를 민망하게 여겨
그날 자신이 한 일로 얻은 수입의 전부인 삼만 원을
아주머니에게 주고 이것밖에 없어서
오만 원을 다 주지 못하니 아이들을 보내고
열심히 살다 보면 이것이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갔다.
살다 보면 뜻밖의 일을 만나게 된다.
모두가 다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남의 일을 무심하게 보지 않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따듯한 이 아저씨의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내 친구였다.
언제나 자랑스런 친구다. 061107
비행기를 놓친 여행길/무정 정정민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
큰딸이 제안하여 온 가족이 제주 여행 가기로 한 것이다.
올 여름휴가는 2박3일로 리조트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내도 그날에 맞추어 자신이 해야 하는 공부를
잠시 쉬기로 했고 둘째도 휴가를 그 시점에 맞추었다.
이 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광복을 한 날을
우리 가족이 광복한 날로 삼아 여름휴가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일로부터 그리고 더위로부터 광복도 뜻이 있겠다 싶어
이른 시간인 오전 7시20분 발 제주행을 15일에 예약을 한 것이다.
드디어 꿈에 부픈 여행을 앞둔 하루 전날부터 꼼꼼하게 챙기기 시작하여
자정이 넘도록 옷과 음식과 세면도구를 다 챙기고
5시에 일어나 다시 미비한 것들을 준비하려고
알람시계를 맞추어 놓았다.
그런데 들뜬 기분이 그랬는지 3시 반 경에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뒤로 다시 잠을 청하나 어설프게 잠이 들뿐
깊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도 그런지 4시에 일어나 이것저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5시가 되어 아이들을 깨우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출발을 시작했다.
나야 간단하게 준비하여 5시에 밖으로 나가 기다리기 시작했고
조금 있다 막내아들이 나왔다. 그런데 아내와 두 딸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타는 가슴을 달래며 기다리니 큰딸이 나오고
이어서 10분을 더 기다리니 아내와 둘째 딸이 나왔다.
공항 비행기가 7시20분에 출발하기는 하지만
집에서 공항까지 가는 시간과 탑승수속을 국내선은
약 30분 전에 밟기 때문에 미리 가야 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렇지만, 평소에 미리 가는 습성이 있는 나는 그보다 먼저
도착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5시30분 출발이 조금 넘어 버린
5시 45분이 되어서야 출발하게 되니 가슴이 얼마나 탔는지 모른다.
그래서 택시를 타야 하는지 우리 자가용을 이용해야 하는지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도 간단하지 않았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전철을 타기로 잠정 합의를 한지라
택시 타는 것은 지나치게 호사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이른 시간에 일어난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5명인 우리 가족이 택시를 타려면
2대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도 했다.
그래서 자가용을 이용하려 하기도 했는데
2박 3일 동안 공항에 주차하면 그 주차비가 만만하지 않아
결국 처음 생각대로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공항까지 한 번의 마을버스를 이용하고
전철을 한번 갈아타야 하지만, 이렇게 가는 방법이
가장 저렴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설마 늦기야 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먼저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출발했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는 마을버스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5분이 소요되고
전철역에 도착하여 쉽게 전철은 탔지만 바꾸어 타고
전철역을 헤아려 보니 생각보다 많은 15역이나 되었다.
대략 10 정거장쯤 될 것으로 예상한 것과는 좀 차이가 나버린 상태였다.
인제 와서 어떻게 돌릴 방법도 마땅하지 않아
공항역에서 뛰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속이 타는 마음을 진정 시키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드디어 공항역에 도착하여 더운 여름도 무시하고
온 가족은 열심히 자신이 가진 출력을 최대화하여 뛰다시피 걸었다.
잘하면 무사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거치는 곳이 많아 수속을 밟는 곳에 도착하니
7시 2분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2분이었다.
마을버스만 놓치지 않았어도 7시에는 도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7시20분 비행기라서 최소한 20분 전에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그 데드라인이 7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면서
마을버스를 놓친 것이 천추의 한처럼 아깝기만 했다.
그래서 왜 아내에게 늦게 나왔는지에 대한 추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남겨둔 강아지가 안타까워 라디오 전원코드를 찾다가
5분을 허비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철역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5역이나 많았다.
여기서도 착오가 생겨 대략 7분 정도 시간이 더 소모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충분하다 생각한 공항도착 시각은 마을버스를 놓친 것과
라디오 전원코드를 찾는 시간 그리고 전철역이 생각보다 많았던 이유로 해서
결국 7시 이전에 도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7시에서
2분이 초과된 7시 2분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2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항공사에서 정한 2분은 우리에게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2분 정도 경과될 것을 알았다면
항공사에 전화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경황이 없어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해내지 못하고 다만 열심히 가다 보면
시간 안에 도착하리라 생각했고 설마 2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된다고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할 리야 있겠는가 쉽게 생각한 것인데
막상 도착하니 우리 자리는 벌써 다른 사람의 자리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도리 없이 공항에 남아 다음 비행기에
우리가 탈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는 일만 하는 도리 밖에
별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약속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타는 가슴을 안고 우리 같은 사람이 다섯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꾸자꾸 항공사 측에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우리처럼 예약시간에 나타나지 않거나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야 이른 시간이라
약속시간에 도착하기 힘들 수 있었지만
우리보다 늦은 시간에 예약한 사람은 착오 없이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없이 시간시간
항공사에 물어보면서 다시 예약할 수 있는 시간을 물었더니
가장 빠른 방법이 오후 2시 예약이었다.
일단 2시 예약을 해 놓고 시간마다 체크를 하기로 하고
공항 휴게실에 앉아 탑승수속을 밟는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비행기를 놓치게 되니 이른 시간에 일어난 것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원인이 발생된 것에 대한 원망도 생기고
많은 시간을 공항휴게실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
마치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도착해야 할 시간에 맞추어 렌털한 차에 대한 재계약도
수시로 변경해야 하고 주차비도 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또한, 첫째 날 구경해야 할 곳에 대한 수정도 변경해야 하고
들뜬 감정이 짜증으로 변한 것에 대한 수습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라 한다면 이 일을 주도한 큰딸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추궁보다는 나머지 여행에 대한 준비를 말없이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살아 온 세월에 비교하여 수십 년이 짧으면서도
어찌 저리 속이 깊고 침착하기만 한지 감탄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사람을 알려면 여행을 같이하라 했는데
몇 시간의 이 사태를 잘 정리하고 다시 수정하고 변경하면서도
짜증보다는 침착하게 나머지 일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낀 바가 많았다. 내 자식이면서도 오히려 스승 같은 아이가
얼마나 마음속으로 기쁨이 되었는지 모른다.
지혜를 얻고 배우는 것은 죽는 날까지 한다는 것을 절감한 날이었다.
시간을 어기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생각과 달리
결국 시간을 어기게 되어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것을 보고
시간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잃은 것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욱 큰 것을 얻었다면
이런 와중에도 큰아이가 침착하여 손실된 것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고
닥쳐올 일에 대하여 준비하고 수정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가족이 서로 원망하고 탓하고 원성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소 짜증난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내 서로 이해하고 준비하고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을 다른 각도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절로 행복해 졌다. 남아 있는 시간 동안
공항의 곳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조금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도 했으니
가족의 단합과 불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기른
오히려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은 잃은 것 같지만 얻는 사람이 있고
얻는 것 같지만 잃는 사람이 있다는 교훈을
다시 얻었다. 제주 도착 예정시간보다 4시간이나 지나 도착했지만
잃어버린 것 같은 4시간보다 가족의 단단한 단합과 사랑을 확인한 것은
분명 더 큰 것이었다.
-8년 전 제주 여행길에서 있었던 일-
봄 바다
글. 寫眞/茂正 鄭政敏
봄바람 부는 4월엔
푸른 바다에 가자!
열일곱 소녀
연분홍 꽃 가슴 그 시절로 가게
검정치마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가자!
널 따란 해변
새들도 자유로운 백사장에서
한 점 장미 꽃이 될 수 있으니
파도소리 반주 삼아
주찬양 해 보자!
반짝이는 햇살 눈이 부셔
높은 하늘이 더 아름다운 날
내 마음은 바다가 된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사랑할 수 있는
넓고 푸르고 부드러운
봄 바람 부는 바다.
영종도 왕산리에서/茂正 정정민
가끔 오래된 일이 되살아나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즐거운 여행이다
인천 영종도 왕산리 여행
3분 목사님과 찬양사역 권사님
그리고 시인 나였다
위너스 호텔에 여장을 풀기 전
밴댕이 무침을 먹었다
인천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안내였다
정말 새콤하고 연한 것이
창자가 놀래 뒤집힐 지경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만남은
조개구이집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역시 이곳 사정을 잘 아시는 인천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 안내
선상 조개구이 집에서 주방장을 자처하며
우리에게 조개를 구워주셨다.
"너희는 아무 염려 하지 말고 먹는 일에 열중하라.
모든 염려는 주방장에게 맡겨라. " 이 한마디에
우리 일행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배가 부르자 호텔에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기도한 후에 이천에서 오신 목사님이
가져오신 산삼을 먹었다
우리 일행을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하셨단다
이런 색다른 경험이 나를 무한 즐겁게 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충전을 마친 우리는
호텔 지하에 있는 노래방에 갔다
그간 쌓인 온갖 시름을 다 풀어 보려는 속셈
찬양 사역하시는 권사님의 노래는
귀를 호강시켰다. 아쉽다면
내가 노랠 가장 못 하여 좀 창피했다
아무도 핍박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멋쩍었다
그렇지만 내 노랠 배우고 싶다는 목사님도 있어
위로는 되었다. 처음 들어 본 노래란다
제목이 "직녀에게".
이렇게 한 날의 일정을 마친 우리는
밤새워 세상 이야길 하며
각자가 가진 삶의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초여름의 왕산리는
물새 울음으로 더욱 고요했다
가끔 뒤척이는 파도 소리도 좋은 자장가였다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보았고
다시 바다 위로 솟구치는 해를 보며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좋은 사람과 보내는 한 날이
바로 천국이라 생각했다
바쁜 일과를 잠시 미루었던 오래전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다시 그날로 갈 수 없고
그때 그분들과 다 같이 만날 수 없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행복한 마음은
언제라도 나를 즐겁게 하고 있다
목련꽃 피는 날의 슬픔
글 영상/무정 정정민
대학병원 중환자실
손에 빨간 액체를 바르고 청의를 입고서야 들어갔다.
날 반겨 맞아야 할 사람이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숨을 쉬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할 내 청력을 의심했다.
움직임도 멈춘 지 오랜 것 같았다.
표정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해야 하는가.
난 그를 알고 있어서 갔지만 그는 누가 오는지 가는지
관심 밖의 일처럼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올해로 56세의 미남자였다.
두 딸과 아내가 있는 참으로 잘 생긴 꽃미남
춤을 잘 추고 친구를 좋아하는 건실한 사람이었지만
이 세상의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만들었는지.
자신의 가게문을 닫고 이틀의 폭음 뒤에
집으로 들어와 문지방을 넘다가 넘어졌다는데
수도 없이 드나들던 문턱이 그날은 유난히 높았단 말인가.
그것이 자신의 집 문턱을 겨우 넘어보는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는 다만 누워 있을 뿐이다.
살아 있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인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애지중지 키운 두 딸이 아빠라는 말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이것을 살아 있다고 해야 하는가.
산소호흡기만 의지하여 겨우 지낸다는 말
그의 아내는 나를 보자 눈물부터 쏟아 냈다.
우리는 어릴 적 부터 친구였는데
이제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도 모른 체 하는 사람이 나를 아는 체 하겠는가만
왜 그리도 섭섭할까
만나면 손을 잡고 흔들던 모습이
곱게 웃던 모습이 영영 떠나지 않는데
이제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나를, 얼마나 서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다시 손을 잡고 흔들며 웃고 싶다는 것을 알까
어깨동무하면서 어릴 적 같이 하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을
최신 유행 곡을 서로 부르고 싶다는 것을 알까.
못하는 술이나마 마주치고 싶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같이 하던 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면
그 행복한 순간을 누가 같이 해줄까.
어서 일어나거라.
환한 목련꽃 같은 미소를 나에게 흘려다오.
가만히 만지던 내 손을 어서 만져다오.
나에게 잘 지냈느냐고 안부도 물어야 하지 않니?
중환자실은 너무 비싼 곳이야
이제 집으로 가야 하지 않겠니?
개나리 꽃이 피기 시작한 너의 집으로 가서
우리 진한 커피 한 잔을 같이하자, 친구야!
내 사랑 목련화야
시 영상/무정 정정민
새벽별이 아직 다 스러지지 않았는데
너는 꿈을 꾸는구나
천상에서 훨훨 나는 꿈만 꾸는구나
어느 그리운 이가 있어서
이 세상을 떠나려 하는가.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초
네가 찾아든 중환자실이 싫었구나!
천상에서 나풀나풀 내리던 봄눈도
너는 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더니
맥을 놓고 하늘로 가고 말았구나!
하얀 얼굴이 목련꽃 같았는데
그 잘생긴 얼굴을 사모한 누가 있었더냐
사랑하는 아내도 모른 체
딸들이 부르는 통곡도 듣지 못하고
내가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구나.
내 사랑 목련화야.
한 날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아직도 봄은 많이 남아 있는데
더 머물지 못할 무엇이 있어
그리 급하게 하늘로 날아갔나?
남아 있는 정이 눈물이 되누나.
머리 커트
글 寫眞/茂正 鄭政敏
머리가 근질근질할 때면
머리를 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은 이틀 정도에 감지만
때론 삼일 만에 감을 때도 있다.
매일 감는 것에 비하면 참 다행이다.
아들이나 딸은 매일 감느라
바쁜 시간에 종종거리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머리를 감다 보면 머리채가 손에 잡히는
감각이 다를 때가 있다.
길다는 느낌이 드는 때다.
그러면 머리 커트를 해야 하는데
이 일이 나에게 쉽지 않다.
무조건 이발소로 가거나 미장원가면 되는데
아내의 제지를 받기 때문에
내 머리를 내 맘대로 하지 못한다.
즉 아내가 머리 커트를 하기도 하는데
너무 바빠 내가 원하는 시간이나 필요한 때에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혼자 할 수 없어 고민한다.
어제도 그런 고민을 하는 날이었다.
머릴 감아보니 머리가 길게 느껴지고
거울을 보니 구레나룻처럼 길게 늘어진 옆머리가
무슨 활처럼 휘어져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아내에게 이야길 했더니 "내일! 내일!" 하면서
미룬 날이 한 주가 지났다.
좀 짜증도 나고 얼른 커트하고 싶어 좀 심한 말을 했더니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헌데 구세주처럼 나타난 막내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인데도 머릴 파마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불난 곳에 부채를 흔드는 격이었다.
하지만, 늦둥이 아들의 애교에 아내는 화를 내다 웃고 말았다.
하고선 둘 다 압구정에서 머릴 해결하라고
돈도 주고 시간도 내주었다.
아들과 난 우리 집의 두 남자다.
이런 일은 여자에게 있어야 하는데
세상이 거꾸로 가는지 남자에게 생겼다.
웬 떡이냐 하고 덥석 받아먹는 기분으로
전철을 타고 압구정 현대 백화점에서 내렸다.
그리고서 아내가 지정한 헤어디자이너를 찾아 갔다.
예약 손님인 것을 알고 젊은 여성 둘이
한 분은 아들을 한 분은 날 맡아
아들은 파마를 난 커트를 해주었다.
여태껏 이렇게 감미로운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머리 한 번 커트하려면
2킬로는 걸어야 했고 억센 이발사의 손으로 깎는 머리가
때론 뜯기고 때론 금속성이 차가워
늘 긴장이 되었다. 더구나 큰 손으로 머릴 감기면
머리털이 뽑히는 것 같고 머리 피부가 다 벗겨지는 것 같아
머리를 커트하는 일은 너무 싫었다.
한겨울엔 물의 온도가 일정하지 하지 않아
뜨겁거나 차가워 머리 커트 하는 날이
감기드는 날이기도 했다.
한때는 머리에 기계 독이 올라 돈 버짐이 생겨
어머니가 치료약이라 하며 마늘을 문지르기도 하여
펄쩍 뛰며 죽는 줄 알았다 너무 쓰리고 아파서
눈을 감아봐도 욱신거리며 쑤시는 통증이 참 오래갔었다.
그래도 치료되지 않자 칡으로 문질렀다. 이 또한
피부가 손상되어 한없이 쓰렸다. 하지만
마늘만큼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치료가 안되자!
이웃집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것인지
모빌유라는 기계 윤활유를 발랐다.
진득거려 벼게를 사용할 수 없어
벼게 위에 비닐이나 코팅된 비료 포장지를 놓고 잤었다.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빌유는 특효가 있어
기계 독으로 생긴 버짐을 쫓아내고 말았다.
머리가 근지러운 것도 없어지고
머리를 자주 감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이발소도 맘껏 다닐 수 있었다.
그 기간엔 학교에서 친구가 같이 앉기를 꺼렸다.
버짐이 옮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 초등학교 시절의 겨울이 지나고
청년이 되어 스포츠형으로 머릴 자르고 다닐 때는
제법 준수한 용모가 빛났었다.
더러 포마드도 바르며 초등학교 시절의 고통스런 시간을
다 잊어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어느 해
공교롭게도 바리캉이란 기계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때야 우리나라 이 미용 업소가 얼마나 되며
머리를 깎는 기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린 날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데 사용한 기계는
굵은 머리빗처럼 생긴 두 날을 겹치게 하고
두 날과 연결된 중심에 고정 비스를 박아 두 날이 어긋나지 않게 하고
손잡이 사이에 스프링을 끼워
엄지와 다른 나머지 손가락으로 쥐었다 폈다 하면
두 날이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그날 사이에 낀 머리털을 자르는 원리였다.
이 이발 기계는 마모가 되면 숫돌에 갈아 쓰는데
오래 사용하다 보면 유격이 커져 머리 커트가
원활하지 못하는 때가 생긴다. 그러면 두 날 사이에
머리털이 끼어 머리가 뽑히기도 한다.
정말 기분 나쁜 통증이다.
현대의 이발 기계는 사람의 손과 스프링으로 하는
두 날의 좌우 운동을 모터의 힘을 빌려서 한다.
날도 정밀하고 쇠의 강도도 높아져
아주 산뜻하고 기분 좋게 머리가 잘린다.
더구나 발전을 거듭하여 쇠가 아닌 도자기 종류로도
날을 만들어 머리 커트가 더 잘 되는 것을 봤다.
이 자동 커터기는 종류가 많았다.
잔털을 깎는 토끼 바리캉 눈썹을 깎는 눈썹 바리캉
강아지나 토끼털을 전용으로 깎는 바리캉 등
나라마다 특색이 있고 품질 좋은 바리캉이
수 없이 출시되었다.
그중에도 일본의 여러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
우리나라 50만 개나 되는 이 미용 업소에
하나 이상씩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도 이 기술이 빨리 선진화되어 일본 제품보다 우수한
자동 이발기계가 만들어지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벌써 이 일을 했던 일이 10년도 넘는 일이니
지금은 우리 제품이 많이 좋아졌으리라 믿어 본다.
이런 추억이 있는 나에게 압구정동의 이름있는
헤어디자이너에게 가서 머리 손질을 하는 일은
수많은 추억을 단숨에 불러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날 머리 깎을 때 이발사의 투박한 손이
머리털을 뽑듯이 깎던 일이나 두피를 벗기듯 심하게
문지르던 그 억센 손길이, 그리고 자동 이발기계로
소리 좋게 머리를 깎는 일을 보게 된 일 그 기계를
우리나라 전역에 팔고 수리했던 일이…….
이날 나는 환상을 본 것 같았다.
여인의 손길이라 그랬을까?
내 머릴 커트하는데 듬북 잡지 않았다.
아주 조금씩 머리칼을 잡아 조용하게 자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발기계가 아닌 가위로 했다.
싹둑 잘라 기분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가려운 곳을 가볍게 긁어 주는 듯
어루만지듯 가만가만 조용하게 자르는데
봄볕에 조는 병아리가 연상되었다.
스르르 잠이 오는 나를 느꼈다.
그렇게 내 머릴 다 자르고 맘에 드느냐고
거울을 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깊은 관심이 없는 터라 대접하는 말로
"정말 환상적입니다. 저를 잠들게 하시는 능력
존경합니다." 했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어서 머릴 감겨 주었는데
앞으로 숙이게 하여 감기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눕게 하여
머리칼 사이 사이를 가볍게 마사지 하듯 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긴장했던 어린 날의 머리 감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라 봐야 할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다시 의자에 앉자 모발건조기로 머릴 말려 주었다.
부드러운 터치 가볍게 스미는 따뜻한 바람이
내 온 전신을 휘감는 것 같았다.
어디서 불어 오는 봄바람일까
여인의 향기일까
야릇하고 향기로운 느낌이 자꾸 나를 감미롭게 했다.
꿈인 듯 눈을 감는 나에게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옥 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다 되었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는 곳이 있는지요?"
정말 한구석도 없었다. 맘에 꼭 들었다.
다음에도 다시 오고 싶었다.
머리가 다 자라 다시 커트를 해야 될 시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매일 오기 힘들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서
황홀한 꿈결로 들어가 잠겨 보고 싶었다.
이것은 머리 커트가 아니라 예술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꽃향기 같았다.
봄바람 같았다.
아들도 맘에 들어 좋아라 하였다.
"머리칼아! 어서 자라거라!"
행복하고 싶어 편지를 쓴다.
글 사진/무정 정정민
날마다 책을 읽고 날마다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읽는 것도 행복하지만
글을 쓰는 것도 행복하다.
고통스럽고 불평만 가득한 세상을 보려 하는 것이 아니고
작아도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고
그 작은 행복의 씨앗을 키워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살지만
똑같은 조건 속에 살아도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믿는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문제와 만나지만
만나는 문제가 좋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힘들게 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생활의 전부인가 생각하였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것과 비슷한
수많은 행복한 일이 있기도 했었다.
무엇을 더 많이 생각하느냐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소한 행복도 놓치지 않으려는 나는
오늘은 무엇이 행복했지 지금은 무엇이 행복한가를
자신에게 묻곤 한다.
강력하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려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아주 작고 미미한 것도 추려내는
행복에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숲에 피는 작고 볼품없는 꽃 하나에
아파트 높이 걸려있는 초승달에서도
문득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향수에서도
미소 하나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이것을 모아 다른 사람에게 편지로 썼다.
사진이 가능하면 첨부하기도 했다.
편짓글에는 내 수필도 있고 시도 있고 산문도 있다.
물론 사진도 있고 간단한 편짓글도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어록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행복 내가 발견한 행복을 쓰고 있는데
이것을 받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정판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한 분이 보낸 편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죄송해요. 아껴서 읽을게요."
나를 행복하게 한 문장이다.
너무 반가워 보자마자 읽어 버렸는데
그래서 다시 내가 편지를 쓰게 되니
그 수고가 미안하다는 말인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꽃처럼 피어나는, 봄꽃처럼 환하게 웃는
향기 가득한 편지다.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 행복하여 지는 일이
행복 중 으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내가 미소 짓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결국, 내 이야기는 더 큰 행복으로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행복하여 지고 싶거든 편지를 쓸 일이다.
즐거운 마음을 쓸 일이다.
송년회 공지
눈빛이 흐려져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오히려 선명하게 또렷하게 보이는 얼굴
우리들의 초딩얼굴
어찌 지내는지 안부를 묻지 않을래?
술 한잔 권하지 않을래?
양의 꼬리가 사라지고 있는 시점
병신년 붉은 원숭이를 기운차게 만나기 위해
우린 만나야 합니다.
안면도의 봄 주왕산의 가을 백담사의 추억을
어찌 묻어둔단 말인가
신나게 웃고 노래하여 봅시다.
만나야 할 날짜와 장소 12월 13일 오후 1시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40길 41 대호 IR 빌딩
전화는02) 521~6032번이고
지하철 2호선 서초전철역 3번 출구
사랑의교회 건물옆 뚜레쥬르 빵집 건물
-회장 정정민 드림-
2015년 송년회 - 무정 정정민
12월이면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워
다정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기도 하고 다음 해는 건강하게
더욱 친밀하게 보내기를 다짐하는 자리다
올해라고 해마다 하던 그 행복한 송년회를
빠뜨리지 않았다. 총무 님이
고심하고 고심하여 알아낸 장소가
사랑의 교회 옆 한정식 "진도 울돌목 가는 길"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했던 곳
임진왜란 3대첩의 장소에서 모임을 갖게 되어
나라에 대한 생각이 새로웠다
나라가 왜적의 침입으로 백척간두에 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구원한 영웅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나라 사랑에 대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자리였다.
모두 건강하여 반가웠다
같이 식사하며 웃고 나니
마음이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같이 하지 못한 여러 친구가 생각났다
차기엔 꼭 같이하길 소원해 보았다.
능력 없는 나를 회장으로 뽑고
부족함에도 탓만 하지 않고
잘한다고 해주어 고마웠다.
하지만 잘하지 못해 미안했다.
플라우어 데몬스트레이션/무정 정정민
외국작가의 플라우어 데몬스트레션을 보게 되었다.
관심분야가 아니라 지금껏 볼 기회가 없었다.
우연처럼 은행잎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과천에서
이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경탄스러웠다.
가을은 이처럼 행운 같은 일을 만들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플레르 10주년 기념행사장에
아는 사람과 같이 갈 기회를 얻었다.
대성황을 이룬 자리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그중에 내 눈길을 가장 끈 것은 일본에서 온 Taichi Matsuo
작가의 플라우어 데몬스트레이션이었다.
이 작가는 건축가였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꽃에 미치기 시작하여
지금은 억대의 연봉을 받는 플러우어 구조물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기자기한 구조물이 아니라 선이 크고 구조가
커다란 대작을 주로 선보이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자신의 전공을 살려
건축구조에 어울리는 설치작품을 많이 만드는 것 같았다.
그날 선보인 작품은 사각 구조물 안에 어떤 의미를 담는 꽃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는데 완성품에서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잎이 꽃이 되고 꽃이 잎이 되는 광경이었다.
맨 처음 인사하는 모습부터가 평범하지 않았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단정하게 인사를 하더니 곧이어서
자신의 겉옷을 벗고 예술가들이 쓰는 빵모자를 썼다.
그리고서는 신중하게 꽃을 꽂는 것이 아니라 쓱쓱 꽂는데
마치 무용수가 춤을 추며 어떤 동작을 하듯이 유연하기
그지없게 꽃을 꽂아서 보는 즐거움도 컸다.
보여주는 예술을 아주 잘하는 작가였다. 선이 크고 굵은 작품을
하는 설치작가인 것이 곧 증명된 셈이었다.
먼저, 자신은 공간이란 사각의 틀 안에 그림을 그리듯
꽃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설명하여 과연 그렇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의 유연하고 능숙한 동작과 솜씨는 예술가다운 면모를 충분하게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완성된 작품에서도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건축구조물에 어울리는 모양을 연출했다.
그중 맨 먼저 만든 작품을 살펴보면
일본 작가이면서도 한국에 흔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입체적인 사각의 프레임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각의 프레임 안에는
이미 오아시스가 들어 있어서 자신이 준비해온
마치 스프링을 연상케 하는 개운죽을 몇 개인지
능란하게 꽂고는 그 스프링처럼 생긴 공간에다가
분홍색 카라를 무슨 뜨게질을 하듯이 우아한 동작으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같은 계열의 안시리움을
보강하여 어떤 골격을 완성하고는 이어서 사각입체 프레임
바닥에 절반은 빨간 맨드라미를 깔았다.
이어서 반대쪽은 초록색의 수국으로 맨드라미 반대쪽을
채우고 나니 개운죽의 초록색과 분홍계열의 카라와 안시리움
그리고 초록의 수국과 맨드라미가 강한 개성을 나타내어
사각 공간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서 환상의 꽃밭을
연출하는 것을 보았다.
완성품에 대한 경이로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즐거웠던 것은 그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의 몸동작이었다.
이것은 작품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니
단순하게 완성해 가는 것보다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도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예술세계에서
많은 것을 보게 되어 즐거운 날이었다.
사람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고 발견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플라우어 데몬스트레이션도 앞으로 많은 변화와
새로운 작품을 통하여 설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도 보여주게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선과 여백을 강조하는 한국 꽃꽂이에 대비되는
커다란 설치구조물에 대한 꽃꽂이도 큰 스케일과
굵은 선이 무척 대비되는 또 다른 모습이란 강한 인상을 받았다.
계절이 바뀌면 궁금한 곳이 이곳저곳이 아니다
지난 봄에 봤을 때는 봄꽃이 핀 곳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꽃이 피었을지 궁금하다 싶으면
그곳에 가보기도 하는데 이번에
이른 퇴근한 아내와 같이 가게 되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목수국을 보게 되었다.
수국을 보면 무척 탐스러워
사진에 담아 보기도 하는데
목수국은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일반 수국이야 조경용으로 울타리에도 많고
공원에도 많고 화단에도 많다
특히 불두화로 불리는 수국은
사찰마다 있었다.
목수국이란 이름으로 눈여겨 보게 된 것은
꽃꽂이를 해본 아내가 수국은
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는 것과
고급 꽃꽂이로 사용한다 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의 꽃을 알게 된 것이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사랑하는 까닭/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복 종/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행 복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발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존재/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고적한 밤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한용운/옮긴 글
요약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했으며
불교 혁신 운동을 벌였고, 시, 시조, 소설을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목차펼치기
1.개요
2.생애
3.불교사상과 불교혁신운동
4.독립사상과 민족운동
5.문학세계
개요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
·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본관은 청주(淸州).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
생애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불교사상과 불교혁신운동
흔히 불교사회주의로 요약되는 그의 불교사상은 불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족 현실 전반에 대한 혁명적 사상의 기반을 이루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불교혁신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책이며,
당시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불교사상이 진보주의·평등주의·구세주의의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조선불교유신론〉)그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염불당 등의 기존의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민중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그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을 펴내고 〈유심〉·〈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는 등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불교의 민중화와 그의 불교활동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불교의 자주화운동이다.
1910년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그 이듬해에 박한영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후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했는데,
그중 정교분립을 주장한 것은 종교를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서 곧 정토를 구하는 대승적인 입장을 취했다.
1933년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를 저술했으며,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도
이러한 불교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립사상과 민족운동
그의 비타협적인 반일 독립운동 역시 불교혁신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는 1919년 3·1운동의 참여를 들 수 있다.
그는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참여한 다음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 검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이유서〉는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그는 이 글을 통해 제국주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이해와 민족의 독립 근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제시했다.
그는 다른 모든 사상에 앞서 인간의 자유와 평화가 우선함을,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민족자존이 요구됨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민족의식이 편협한 국가주의가 아니라 민족간이나 국가간의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자주독립의 조건이 독립할 만한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에 있음을 천명하여 물질문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조선 식민지 지배의 근거로 삼았던 일제의 허구적 논리를 정확히 비판했다.
이는 준비론이나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등
결국 일본의 식민정책에 부합한 개량론과는 질을 달리하는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으로 평가된다. 좌·우파 간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한 것도 그의 대표적인 민족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전부터 우파의 민족운동과 좌파의 사회운동이 분열되어서는
안 됨을 역설한 바 있으므로 신간회에 관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에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했을 때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음을 주장하고
신간회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가 하면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또한 그는 여성해방운동과 농민·노동 운동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자주화운동에 앞장선 것도 민족독립운동의 하나로 보인다.
문학세계
그가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불교개혁사상이나 민족독립사상,
그리고 그 실천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문학활동은 시에서 출발하여 시조와 한시 및 〈죽음〉·〈흑풍〉·〈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로까지 확산되었으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낳은 것은
역시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시 장르이다.
1925년 백담사에서 탈고하여 이듬해 안동서관에서 발행한
〈님의 침묵〉은 당시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더 절실하게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이 부재한 상황을 통해 '나'가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를 드러내고, 새로이 '나'가 님과 합일될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는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을
노래한 것도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진리와 통한다. 이러한 시적 인식을 통해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실천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탁월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부분 1930년대에 창작된 그의 소설은
신소설적인 계몽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그가 근대소설의 특수성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가운데
소설을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생각한 데서 연유한다.
즉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더이상 직접적으로
항일독립사상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소설을 창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를 무대로 한 〈흑풍〉에서도
일제에 대한 투쟁정신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의 고취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전집〉 전6권이 간행되었다.
만해마을에서/무정 정정민
만해 마을에 도착하자 맨 먼저 생각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유배지였다는 것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의 민족과 나라 사랑
그리고 시 세계였다.
수심교를 지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해가 산마루에 걸려 이내 어둠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둠이 만해마을을 삼켜버리면
주변 풍경을 볼 수도 없고 시인의 시와 관련된
어떤 것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기념관부터 찾아가 가볍게 둘러 보았지만
역시 시간이 많지 않아 결국 가볍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같이 온 친구들을 자꾸 찾아야 했고
곧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은 대기해야 내려가는 차를 탈 수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두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린단 말인가
주차장에서 개울까지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서서도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우선 맑은 물과 개울에 수없이 쌓아있는 돌탑
그리고 차 타기를 기다려 보았다
몇십 분인가를 기다려 보니 슬슬 허리도 아프고
발목도 아파졌다. 다리 하나로 오래 서보면
다리의 피로도가 급격하게 몰려온다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좌우로 교대하며
한쪽 다리를 쉴 수 있어 꽤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지만, 다리 하나만을 사용하면
교대로 쉴 수 없어 몇십 분이면 이미 지쳐버린다
결국 쥐가 나는 것을 느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길게 늘어선 맨 앞자리로 가서
양해를 구하고 차를 먼저 타던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그곳에 앉아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방법이다.
차선책을 택해야 했다. 나를 먼저 차에 태워주지 않아서였다
다행이라면 관리인이 자신의 자리에 나를 앉게 했다
그렇게 기다린 두 시간이 지나 친구가 나타나
우린 험하고 좁은 어두운 산길을 내려올 수 있었다
나에게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준 사람들에게 고맙긴 해도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약점은
나를 슬프게 하기도 했고 감사하는 일에 더욱 익숙하게
하기도 했다.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 문학관이 아쉬워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를 같이 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