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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공원 야생화
2013. 9. 23. 23:07
인천 대공원 야생화
야생화
시. 사진/茂正 鄭政敏
이름없어
불러주는 이 없어도
때가 되면 피어나고
아름답지 않아
눈여겨 보는 이 없어도
조용히 웃고 있는 꽃
산길이면 어떠랴
들길도 상관없다.
담 모퉁이라도 좋다
낮에는 햇살 좋고
밤에는 별빛이 좋아
조용히 피고 지면 그뿐
이름이 필요할까
보는 이 없어도
다만, 꽃이면 족하다.
야생화 길/무정 정정민
인천 대공원은 다양한 주제로 조성되어 있어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그 주제를 이용한다
이번에는 가을꽃이 보고 싶어 야생화 길을 택했다
주차장도 정문과 장수동이 있는데 그중
야생화 길과 가까운 장수동을 이용했다.
한낮의 태양은 여름처럼 따가워
오래 걷기도 힘들어 숲길을 따라 걸었다
야생화 길에는 별다른 꽃은 없었다.
억새가 피고 벌개미취 등 몇 가지만 피어
나를 반겼다.
야생화 길 조금 더 들어가면
숲 속 독서함이 있는데 이곳엔 의자가 많다
물론 메타쉐커이어등의 나무도 많아
의자에 앉아 쉬기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의자에서 가지고 간 떡과 포도를 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었는지
몹시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정말 피곤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도 여러 코스가 있는데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다.
이렇게 하루 운동량을 채웠다는 생각으로
하루분의 건강을 지켰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왔다.
나들이 나온 많은 가족도
구경거리가 되었고 청솔모나
나비 잠자리도 볼거리가 된 가을
역시 공원은 좋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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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순
2013. 9. 22. 00:51
고구마 순
고구마 순
시 寫眞/茂正 鄭政敏
베란다 한 귀퉁이
빈 화분 있어
무엇을 심을까 궁리 하던 차
바람 빠진 고구마 있어
반쯤 묻어 두었다.
며칠 지났을까
표면에 조금씩 돌기가 돋더니
밤색 어여쁜 순이 올라왔다
기쁜 마음에 물주며 날마다 보았다
어디에서 그런 덩굴이 나왔을까
뻗고 뻗어나와 베란다에 가득하다
밤색 어린 순이 푸른 색으로 변하고
덩굴 줄줄이 하트 잎을 달고 나와
고놈 참 기운차다 했더니만
어린잎마다 허연 진딧물이가 생겼다.
이 높은 베란 다 어디서 왔을까
순을 자르기도 하고
잎을 따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어
쌀뜨물을 투여했더니
진딧물은 줄고 여전히 기운차게 자라
푸른 이파리 자랑스럽게 펼치고 있다.
잎줄기 따와 껍질 벗기고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된장 넣고 조물조물 한 뒤에
풋고추 썰어놓고 갖은 양념을 다하여
밥상에 내놓으면
그 담백한 맛에 밥 한 그릇 뚝딱 했던 추억
어머니 손맛 고구마순
어찌 있는단 말인가
오늘은 아내를 졸라
그 맛을 보련다
고향 집 고구마밭
실한 고구마 씨알
그 고구마 쪄낸 향기도
같이 느껴보려.
고구마 순/무정 정정민
베란다 고구마 순이 기운차게 뻗어 가고 있다
너무 많아 일부는 잘라 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베란다에 가득하다
창문을 여닫기 힘들 지경이다.
푸른 이파리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햇살에 반짝일 때도 그 잎이 자랑스럽고
하트 모양이 어여뻐 나팔꽃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나팔꽃잎과 많이 닮았다
잎만 그런 것이 아니고 꽃도 그렇다.
창밖 아래서 큰아이와 막내가 배드민턴을 친다 하여
창밖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보며
고구마 순도 찍어 보았다.
올여름은 이 고구마 순이 난을 대신하여
내 마음에 풍요를 주었다.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 고향의 고구마밭도 생각나고
고구마 캐던 일 고구마순 나물 맛있게 먹던 일도 생각난다
아내도 이제는 고구마순 나물 무침을 잘하는데
베란다에 가득한 고구마 순으로 나물 한 번
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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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 3 물그림자
물그림자/무정 정정민
어느 하늘이 저리 맑은가
구름 한 점 없어
오염된 나를 비추어 볼 수 없다
그 하늘 몽땅 들어 온 저 호수
작아도 하늘을 담아내는 깊이
내게 저런 능력이 있다면
그대를 그리는 마음
송두리째 풀어 보련만
차마, 그러지 못하여
물그림자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평화공원 3 에너지 드림센터/무정 정정민
하얀 건물 유리창이 45도나 기울어 있는
건물 위에는 태양열로 전기를 만드는
솔라판이 붙어있는 건물에 들어갔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해설사를
불어 주었다.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은
태양과 바람과 땅
태양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고
지열을 이용하여 에어컨 대신 쓰고
바람을 이용하여 풍력발전기를 돌렸다.
이 건물이 45도 기울어진 유리창이 있는 것은
여름과 겨울의 태양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생각하여 에너지를 만들고 절약하는
방법이었다.
창문도 3중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열을 차단하고
안에서 나가는 열을 또한 막았다.
그래서 다른 건물에 비하여
무려 86%나 에너지를 절약하고 있었다.
지하철 정전체험도 하고
자전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거울로 반사한 빛으로
비행기를 비행시키는 일도 해봤다
신비하고 즐거운 체험을 했다.
이번 평화공원 산책길에 최대의
추억이 된 것 같았다.
이 건물은 독일 기술로 지은 것인데
많은 사람이 이 건물 구경을 하러 온다고 했다.
선진 기술이라 해도 우리 선조는 이미
이것을 이용해 오고 있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우리가 우리 것에 대한 긍지가 부족한 것이 아닌지
이미 우리가 알고 있고 사용하는 것 중에
과학적 입증을 하지 못해
마치 후진 기술만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되었다.
이 건물이 여름과 겨울의 태양고도가 달라
유리창을 각도가 기울어지게 한 것인데
우리 한옥의 남향집은 겨울에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오고
여름에는 처마 끝에 머물러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구조이니
그것이 선진 기술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해설사의
설명을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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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 2/풀 숲
억새꽃 피면
詩 寫眞 茂正 鄭政敏
푸른 잎 너울너울
춤추는 억새는
속으로 그리운 마음
다 감추지 못하고
서걱서걱 노래한다.
그 노래 따라 어느덧
다 자라
여린 꽃 한 송이 피워냈다.
어린 강아지 눈빛 같던 꽃은
가을을 불러내고
달빛 밝은 날은 몰래 운다.
어젯밤 서글픈 내 마음
달빛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평화공원 2 풀 숲 / 무정 정정민
평화공원은 주변에 공원이 많아
가기만 하면 산책하기 참 좋다
벌써 몇 번인가 다녀온 곳이지만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어
추석 전날 다녀왔다.
우선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약간 출출하여 마트에 들어가
무언가를 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많이 걷지 못하는 내게는
좀 벅찬 거리였다.
마트가 크다 보니 많이 걷게 되었다.
다소 지친 상태에서 분수가 있는 호수로
다시 호수 옆 징검다리를 건너
공원의 외진 외곽 길을 걸어
초원에 도착했다.
한강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보기도 했다.
억새와 수크령이 피는 곳
산딸나무 열매가 붉게 익어가고
낙상홍 작은 열매가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푸른 초원 한쪽에 자리 잡은 무릎조형물
다양한 형태에 감탄했다.
이렇게 천천히 걸어보는 즐거움
풀숲을 좋아하지 않고서야 가능하겠는가
무릎이 시큰거려 먼 거리는 걷지 못하였지만
평화공원 구경 잘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신기하게 생긴
드림 센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어 인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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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오두 돈대
2013. 9. 19. 09:47
강화 오두 돈대
오두 돈대
염하강 거센 물결
적병이 올까마는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어
잠자지 못하는 초병
성벽에 이끼 끼고
야생화가 자리 잡아도
나라를 지키는 일은
숨 쉬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순간도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목숨을 다할 뿐이다
이제 세상이 변하여
그 초병도 사라지고
성벽도 긴 역사를 말해주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목숨을 바친 충군의 영혼은
여전히 성루에 남았다.
염하강 여울 여전하고
성능좋은 무기가 개발되었지만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일은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모두 해야 할 일
까치 울고
잡초 무성해진 오두 돈대
우리의 역사로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음악:천년의 침묵/김영동
역사의 흔적을 관심을 두고 보는 일은
쉬운 일 같지만, 생활과 직접 연관이 적어
눈으로 보면서도 지나치게 마련이다
오두 돈대 앞을 여러 번 지나갔지만
실제 답사를 해보거나 역사 속의 사연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저 궁금했다.
그래서 주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둘러보았다.
탁한 염하강이 거세게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성벽은 여러 가지 잡초가 자라고 있어
역사가 오래된 것을 알려 주었다
돈대 안에는 잡초만 무성하여
이곳에서 초병이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힘들었을 일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누군가 돈대가 무엇하는 곳인지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었을까
오두 돈대는 군사적 어떤 요충지였는지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감당했는지 묻는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 장어가 많이 잡혀
장어집이 있고 낚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포도 또한 맛있는지 포도집도 성업 중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든 변하는 것이
우리 삶이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멀리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풍요로운 가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보. 진. 돈대에 대하여
진과 보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주둔 지역입니다.
돈대는 조금 높직한 평지에 초소가 있던 곳을 말합니다.
강화 5진 7보
1)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53 곳에 있는
강화53돈대를 관할하는 곳이 진과 보이다.
2)진과 보는 모두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진과 보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 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1.강화 5진
1)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
2)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
3)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
4)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5)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2.강화 7보
1)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
2)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
3)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
4)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
5)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
6)철곶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철산리.
7)승천보 : 강화7보의 하나. 송해면 당산리.
3.강화53돈대
강화에 있는 국방 유적으로 53개소의 돈대를 말한다.
갑곶돈대, 계룡돈대, 덕진돈대, 택지돈대, 장곶돈대, 광성돈대,
선수돈대(송강돈대), 무태돈대, 좌강돈대, 초지돈대,
삼암돈대, 분오리돈대, 손돌목돈대, 가리산돈대, 걸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 낙성돈대,
동검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섬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숙룡돈대, 속우돈대, 송곶돈대, 양암돈대,
오두돈대, 염주돈대, 옥창돈대, 용강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
제승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추루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등이 있다.
진, 보, 돈대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을 올려드립니다.
1.초지진
종 목 사적 제225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시 대 조선시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
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2.덕진진
종 목 사적 제226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3.광성보
종 목 사적 제227호
지 정 일 1971.12.28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시 대 조선시대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4.갑곶돈
종 목 사적 제306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외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5.택지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3호
지 정 일 1995.11.14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4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쌓고 그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강화 53돈대 중의 하나인 이 돈대는 화강암을 이용해
정사각모양으로 쌓아올렸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4개 설치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성 위로 낮게 쌓은 담의 일부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1998년에 완전 복원해 놓았다.
인근 마을에는 이 돈대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이 때문에 돈대를 제단처럼 여기고 보호하여 지금까지 그 본모습이 잘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어영군 2천명과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승군 8천명이 동원되었다.
6.삼암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223-1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7.분오리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185-1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강화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돈대는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매우 넓으며,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평면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4곳에 문을 설치한 외곽 포대로, 관아에서 돈장을 따로 두어
관리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띠었다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명이 동원하여 쌓았다.
8.장곶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9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13외 2필지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이 돈대는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그 위에 작은 요새를 만든 것이다.
장곶돈대는 40∼120㎝의 네모난 돌을 3m 높이의
둥근 형태로 쌓은 후, 해안을 향해
4개의 포좌(포를 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포좌는 지름이 45㎝, 안의 너비가 18㎝, 길이가 24㎝의 크기이다.
그 위로는 낮은 담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건립한 것으로,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검암돈대과 함께 장곶보에 소속되어 있었다.
9. 계룡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제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드문 예이다.
10.망양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망양돈대는 남쪽으로 건평돈대까지 3,200m, 서쪽의 삼암돈대까지
1,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포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돈대로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곳) 4곳, 치첩 40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으로,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 승군 등 모두 8,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1.건평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8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39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정포보 소속의 돈대로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의 감시소 역할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겸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이 돈대를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12.굴암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9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487번지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정포보 소속의 이 돈대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포를 설치해 두기 위한 포좌를 4곳에 설치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재임해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아놓은 것이라고 전한다.
13. 미루지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0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높이 2.2m, 둘레 128m의 규모로, 성곽은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쪽을 향해 4개소의
포좌(포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출입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
다른 돈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한다.
14.북일곶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1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산361
시 대 조선시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던 이 돈대는 높이 2.5m,
둘레 120m 의 규모를 지닌 직사각형으로,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곳과,
치첩 32개소를 두었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명이 동원되어 40일만에 지었다고 한다.
15.용진진
종 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2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215외 9필지
시 대 조선시대
진이란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도시를 이른다.
용진진은 조선시대 각 진에 배치되었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던 곳으로,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한다.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출입문 2곳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16.선수돈대(송강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31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송강돈대’라고도 불리운다.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각이 지게 쌓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반달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검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가 있는데,
이 돈대와 굴암돈대는 관아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17.망월돈대 및 장성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
지 정 일 1995.03.01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망월리에 있는 이 돈대는 40∼120㎝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관리는 관아에서
따로 돈장을 두어 관할하도록 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으로 유수 민진원이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아올렸다.
돈대와 함께 있는 이 장성은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광해군 10년(1618) 안찰사 심돈이
수리를 하였고, 영조 21년(1745) 강화유수 김시환이
다시 고쳐지었다. ‘만리장성’으로도 불리웠으며,
지금은 홍수를 막거나 물을 저장해 두는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18.화도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하고 안은 낮게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이 돈대는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이다.
19.무태돈대
종 목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지 정 일 1999.03.29
소 재 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 산151-4외 1필지
시 대 조선시대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이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해안을 향해 4곳 설치해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
충청·전라 3도 승병 8천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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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 콩
2013. 9. 18. 17:35
장단 콩
된장에 대한 추억/무정 정정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된장을 이마에 붙인 적이 있다.
몹시 쓰리고 아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칙칙하고 불쾌하여 떼어내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무서워 감히 떼어내지 못하고
서럽게 울어야만 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작은 포구가 있는
전남 무안의 일로였다.
작은 논들이 계단을 이루고 있는 마을은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사는 좀 큰 마을과
우리가 사는 몇 채 안되는 동네와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이 샛길로 우리는 달리며 놀고
바닷가에 가서 갯고둥이나 조개를 줍고 놀기도 했다
하루는 동무들과 소살이라는 놀이를 했다.
소살이란 5미터 정도 되는 새끼 끝을
한 친구의 손목에 묶고 다른 끝은
또 다른 친구가 잡고 소를 몰거나
끌고 가는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누가 소가 되고 누가 소를 모는 사람이 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내가 소가 되었었다.
마을과 마을로 연결되는 논길을 지나가는데
이곳은 윗논과 아랫논의 높이차가 컸다.
그래서 윗논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아랫논으로 흘러갈 때 상당한 낙차가 있어
마치 폭포처럼 보였는데
물이 늘 흐르다 보니 이곳은 돌로 쌓은 돌벽이
몹시 미끄러웠고 물이 떨어지는 곳은
작은 웅덩이가 생겼었다.
이 웅덩이에는 작은 물고기도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만 이곳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소는 눈을 감아야 하는데
눈을 감았기 때문에 발을 헛디딘 것 같았다
이때 굴러떨어지며 이마 한가운데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몹시 아프기도 하고 피도 많이 나서
마구 울며 집으로 갔는데
어머니께서 그 큰 상처에 된장을 바르신 것이다.
오래되어 시커먼 된장은 염도가 좀 있었는지
상처를 몹시 쓰라리게 하여
다친 곳이 아파 울던 나는
더욱 심하게 울게 되었다.
상처를 입고 온 아들이 안되어 화가 나신 어머니
된장을 발라도 된장 사이로 스며 나오는
피가 더욱 안타까워 화를 내셨다
아프기도 하고 어머니가 화를 내시니 무섭기도 하여
툇마루 한구석에서 서럽게 울었던
어린 날의 6월이 생각난다
하늘은 참 맑았다
벼포기도 푸르렀다
햇살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마냥 좋기만 했었는데
그 아름다운 순간이
상처로 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마에는
훈장처럼 상처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
이때 같이 놀던 친구 얼굴은
한사람도 떠오르지 않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푸른 논벼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위에 쏟아지던 햇살
그리고 논 사이로 흘러내리던 맑은 물은 생각난다.
얼마큼 나이 들었던
초등학교 다닐 무렵은
그곳에서 떠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새로 이사 온 곳에도 장독은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늘 장독을 닦으시던 모습이
선하게 생각난다.
봄이면 햇살이 잘 비추이던 곳
그 장독대에는 된장이 익어갔다.
잘 익은 햇된장은 누렇다
좀 짜긴 해도 그 맛은 고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장독 뚜껑을 열고 그 맛을 볼라치면
저절로 무언가가 먹고 싶어진다.
이때 나는 어린 무궁화 잎을 따서
된장을 넣고 싸먹었던 기억이 있다.
시집온 형수께서 된장과 고추장을 반반씩 섞어
상추쌈을 하시던 것도 기억난다
된장국을 끓이면 더러 된장 덩어리가
숟가락에 걸릴 때가 있다
마치 무슨 고기라도 되는 듯
정말 맛있게 먹었었다.
우거지에 멸치 가루를 넣고 된장을 넣어
끓인 우거짓국은 어찌나 맛이 좋던지
한 그릇으로 양이 차지 않았었다.
그 된장이 생각나 정말 맛있는 된장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장단 콩을 파는
평화 누리 장단 콩 코너
청정지역에서 생산된 콩과 된장으로
날마다 맛있는 된장국과 나물무침을 먹으리라
음악:바람의 소리/김영동
된장/무정 정정민
좋은 콩으로 메주를 만들고
잘 뜬 메주로 숙성을 잘 시켜야
맛있는 된장이 된다.
맛없는 된장은 너무 짜거나
발효가 적절하게 되지 않아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예다
사실 잘 숙성된 된장은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숙성이 잘 안 된 것은
다른 맛있는 양념을 가미해도
반찬이나 국이 제대로 맛을 내지 못한다
된장은 시골 형수님이 만들어 주시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 가족이 일 년을 먹기는 좀 부족하여
더러 사 먹기도 하는데
사 먹는 된장이 맛있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어디에서 위생적이고 맛있는 된장을
한 번 먹어 볼 수 있을까 해서
평화 누리 장단 콩 코너에 가게 되었다.
이제는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그 메주로 제대로 된 된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
과정이 중요한 된장 만들기
정말 해볼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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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 구름 2
시. 사진/茂正 鄭政敏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양도 각양 색도 가지가지
바람 따라 흘러가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구름산도 넘고 매봉산도 지나
관곡지 연꽃도 보고
안산의 해바라기도 보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벼꽃도 보고
어느 산골 아줌마의 탄식도
고요한 낚시꾼의 졸린 눈빛도
뙤약볕에 김매는 농부의 고단함도
먹이를 취하는 왜가리도 보았으련만
그저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이 전부인 양
머물지 못해 바람 따라 가는 구름
나도 저 구름처럼
세월의 강을 저리 흘러서 가겠지
탄식과 환희의 노래를 하면서.
시흥 갯골 생태공원 2/정정민
여름 날에도 단풍고운 가을 날에도 갔던 갯골
새로 단장하느라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최근에는 입구에만 갔었다.
수 많은 바람개비가 돌던 곳
코스모스 많고 부용화도 많았던 곳
벚나무도 많았고 갈대 또한 정말 많았다
염전도 있어 체험하기 좋았는데
지금은 공사중이라 이 모든 것을 다 보기 어렵다
넓은 푸른초원도 보이지 않고
이곳저곳 파헤친 공사의 흔적만
상처처럼 남아있어
축구하는 아이나 달리던 말도 보이지 않고
하늘에 둥실 떠가는 구름만 보였다.
어쩌면 내년에는 이곳에서
앞에 열거한 것을 다 볼 수 있으리라
창공높이 떠있는 구름이 잘 보였다.
먼지가 풀풀나는 길을 가다
이곳저곳에서 찍어 본 구름
소금창고가 배경이 되기도 하고
아파트가 소나무가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어느 가을 날의 한가로운 모습 같아
잠시 더위를 잊기도 했다.
이렇게 글을 썼던 지난가을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가볍게 쉬기 좋은 곳은 분명하다
벌써 텐트를 준비해와 쉬는 분이 많았다.
정자 하나를 통째로 자리 잡고 가족과 쉬는 분이 많았다
나도 가끔 호숫가에서 쉬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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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갯골 생태공원 1
푸른 초원
詩&寫眞/茂正 鄭政敏
하늘에 흰 구름 떠가면
내 마음은 초원을 달린다.
거칠 것 없는 널따란 대지를
검은 털이 깨끗한 말이 되어
힘껏 질주한다.
지평선 저 멀리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
꿈과 희망이 솟아나는
맑은 샘이 있다는
그 전설을 믿고 달린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듣고
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초원 끝의 그 샘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고
향기로운 과일이 열리며
온갖 새들과 짐승이 찾아와
목을 축인다는 곳
한 모금의 물로도
영원히 늙지 않고
피로가 오지 않아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그 전설을 믿고 간다.
구름은 그 샘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십자 성
푸른 잔디는 영원히 늙지 않는 내 고향
오늘도 초원을 달린다.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을 보며
시흥 갯골 생태공원 1/무정 정정민
시흥 갯골 생태공원은 가끔 간 곳이다
찾는 사람도 많지 않고 넓은 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공장도 없고 멀리까지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나무야 많지 않지만, 해양 생태를 보기 쉬운 곳이다
새 단장을 하고 축제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가도 되는 곳이란 생각으로 갔지만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도 막혀있어
온 것을 후회도 했었지만
기왕 온 것이니 둘러볼 생각으로
막아놓은 샛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차장은 새로 생겼고
주 통로도 새로 생겨있었다
과거의 상식으로 왔기 때문에 힘들게 들어간 것이었다.
이전보다 더 깔끔하고 많은 시설도 들어 서 있어
다 둘러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22미터 높이의 전망대에서
사방을 보며 카메라에 주변을 담아 보기도 했다.
이제는 가끔 쉬는 곳으로 해도
되겠다는 즐거움을 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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